home > 커뮤니티 > 묵상나눔
묵상나눔

[9/19]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8-09-18 20:59 조회30회 댓글0건

본문

<1코린12,31-13,13 / 루카7,31-35>


코린토 1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를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이런 분이심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다행스러운지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참고 기다림에 서툴고, 자주 친절하지 않은 내 부족함이 부끄러우면서도, 이런 나를 참고 기다려주시고 한결같이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것도 사실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지요. 그래서 어느 모로 오늘 제1독서는 사랑의 정의를 통해서 다시금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다른 분이신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나 우리와 다른 하느님께서 이 다름을 뛰어넘어 우리를 당신과의 일치에로 초대하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만나서 친교를 나누게 된 것인데, 이 친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요한1서에서 말하듯,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1요한4,9) 그래서 이 친교에는 하느님의 사랑,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과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들의 역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사랑의 몸짓에 응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과의 친교에로의 초대를 스스로 거부한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의 몸짓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각자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서, 함께 지내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또 가난한 이들의 요청을 통해서, 매 순간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하나하나 깨어 응답하면서, 점차 우리도 사랑이신 분을 닮아갑니다. 그렇게 제1독서에서 사랑의 정의를 보면서 느꼈던 나의 부끄러움과 하느님께 대한 감사함의 간격도 점차 좁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아울러, 아시다시피 지금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친교를 나누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도 서로가 보내는 몸짓들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친교, 모든 피조물 간의 친교, 특별히 남과 북의 친교 등, 우리가 바라는 모든 친교 안에서 관계된 이들이 깨어 잘 응답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과 하느님의 지혜를 함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