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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눔

[9/2]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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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8-09-02 14:00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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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4,1-2.6-8 / 야고1,17-18.21ㄴ-22.27 / 마르7,1-8.14-15.21-23>


제가 사는 남평 수도원에는 진돗개 믹스 강아지 두 마리가 있습니다. 가까운 수녀원에서 5월 1일 한 배에서 난 남매이구요, 한달 쯤 지나 데려와서 여자애는 오들이, 남자애는 버들이라고 이름 지어 키우고 있지요. 한참 이쁠 때라 우리 수사님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고, 또 시간이 될 때마다 ‘앉아’, ‘앞발’과 같은 명령어들을 배우고 있는 중이지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아서 시켜도 자기들이 하고 싶을 때만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똑똑한 강아지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규칙들을 하나씩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게 강아지들을 훈련시키다 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는 한데, 강아지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서는 훈련이 필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졸릴 때 잠을 자야 한다거나, 배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규칙은 굳이 정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자고 먹더라는 것이지요. 


법이라는 게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라고 규정하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규정하는 법도 없지요. 극단적인 예로, 슬플 때 눈물을 흘리라거나, 기쁠 때 웃으라거나 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규정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렇게 할 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또 배가 부르면 밥을 먹지 말라거나, 이틀 연속으로 밤새지 말라거나 하는 법도 본 적이 없습니다. 굳이 정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 그런 법은 애당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결국, 법이란 우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동의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완전히 원하지는 않기에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것들을 규정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알려주신 율법이나,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알려주신 사랑의 법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는 알지만, 아직 마음에 완고한 구석이 있어서 흔쾌히 하지 못하는 것들을 소위 법으로 정해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지요. 언젠가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법이 무어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22,37-40)


실제로 율법의 조항들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삶 안에서 더 기억하고, 또 가난한 이웃을 돌볼 수 있는지 하는, 율법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도 기다려주고, 용서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내용들이었지요.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옳은 줄은 알지만, 마음으로부터 항상 기꺼이 하게 되지는 않는 것들입니다. 답답한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도 열불 나는 일이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억울하지요. 그러니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참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쁘게 하기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죄짓지 않으려고 억지로 법을 지키기는 하지만, 마음과는 무관하게 점차 형식적으로 지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겠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지혜롭고 슬기로워지며,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셨는데, 어쩌다 보니 율법이 사람들을 구속하고, 짐을 지우는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래서야 사람들이 느끼는 법이란, 억지로 사람을 강요하는 권위, 하지만 옳은 것이니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는 대상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법은 나에게 슬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아무리 외적인 행동을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억압된 마음속에는 늘 나쁜 생각들이 부글거리고, 또 아무리 손을 씻고 그릇을 씻어도 그 생각들이 나를 더럽히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하기보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세세한 규정들을 강조하고, 그것을 지키는지 여부로 사람들의 의로움을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법으로 억압하고, 사람들을 두려움 속에 가두려고 했던 것이지요. 말 그대로, “입술로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멀리 떠나 있고, 하느님의 계명은 버린 채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백성들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법은 내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해줍니다. 그러니 아직 마음에 완고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에게 법 규정은 참 고마운 길 안내자이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법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완고한 마음이 부드럽게 변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도 더이상 법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고나 할까요? 말하자면 법은 있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아시다시피 미워하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억지로 사랑하려 하다 보면 내 마음을 억압하고 나만 지치고 힘 빠지게 되는 결과에 이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야고1,17)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바를 따르기 위해 내 의지로 노력하는 가운데,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것. 그러니까 내 의지와 하느님의 은총이 만날 때, 그때 우리 마음이 변화된다는 것이지요. 비로소 하느님의 법이 더이상 구속하는 법이 아닌, 자유의 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법을 자유로이 지킬 수 있는 사람들, 법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듯 자유로이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강한 의지와 함께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는 은총을 함께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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