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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 연중 제26주일 (이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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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9-09-28 22:26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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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6,1ㄱㄴ.4-7 / 1티모6,11ㄱㄷ-16 / 루카16,19-31>


재물은 좋은 것일까요? 구약을 보면, 재물이 곧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재물은 분명 축복이고, 또 재물이 있어야 우리 마음도 너그러워져서 다른 사람을 돌볼 여유도 생기니, 재물을 나쁘다고 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물이 많은 부자도 그 자체로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느님께 재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찬찬히 보노라면 좀 이상합니다. 그렇듯 재물의 축복을 받았던 부자가 죽음 이후에 부유하게 좋은 것들을 받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복음에 따르면 그가 특별히 죄를 지은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죽어서까지 자기 형제들의 처지를 걱정할 만큼, 가족에 대한 사랑도 많았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구 8명 가운데 1명이 굶주리고 있고, 세계 어린이 4명 중 1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개발도상국의 5세 이하 어린이 가운데 3명 중 1명은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곡물 생산량만 놓고 보면, 기술 개발 등으로 40년 전과 비교해서 그 생산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고, 그 결과 전 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오늘날의 현실은, 식량부족이 아니라 나눔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격 유지를 위해서 곡물을 바다 속에 버리기는 할지언정, 그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이기심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이 그렇게 공평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나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해도 늘 뒤쳐질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지요. 전 세계적으로 볼 때도, 내전으로 나라를 잃고 생존마저 위협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평화로운 일상을 당연하게 누리는 이들도 있고, 공부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글조차 쓰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외국어를 공부하고 고상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러한 불공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왔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생산력을 크게 늘리기도 했고, 또 공산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모든 재화를 균등하게 배분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성경은 시종일관 인류에게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모든 이들이 서로를 돌보고 나누는 노력을 통해서 이 불공평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나눔의 대상이 자기 가족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의식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재화가 있었음에도 그 나눔을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만 한정짓고, 바로 대문 앞에서 굶주리고 있던 이웃의 딱한 처지는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배고픔과 불평등은 과학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 너그러운 마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굶주린 이웃을 보고도 못 본 채 한다면, 그것은 굶주린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더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이야기하시지요. “여러분이 빵의 모습 가운데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보는 것은 훨씬 더 쉬운 일일 것입니다.”


비단 먹을 것과 재화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소외된 이들, 아픈 이들, 권력자들에게 핍박받아 목소리를 감히 내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라자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계를 넘어선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그들과 나누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인 것이지요.


특별히 오늘은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을 기억하는 이민의 날이기도 합니다. 비록 생김새가 다르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 안에서 그들은 이미 우리의 이웃이요, 형제자매들이고, 또 낯선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라자로들인 것이지요. 이들이 건강하게 우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잘 만드는 가운데, 우리 각자가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로 다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가족에게만 한정된 너그러움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다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너그러운 마음, 연민의 마음으로 말이지요. 그렇게 그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또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그리고 이민의 날을 지내면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신 말씀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티모6,11) 우리도 하느님의 사람들로서, 같은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 사랑과 인내, 온유를 추구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라자로들을 외면하지 않고 너그럽게 돌보고, 특별히 이민자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랑과 인내와 온유가 우리 마음 안에 열매 맺히기를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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