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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눔

[7/14] 연중 제1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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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9-07-14 11:36 조회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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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30,10-14 / 콜로1,15-20 / 루카10,25-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그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지 말씀해주십니다. 그 사람을 먼저 발견했던 이들은 사제와 레위인이었습니다. 소위, 사회의 지도층, 존경받는 위치의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피투성이의 그 사람을 보고는 그를 피해 다른 길로 가버립니다. 아마도 손에 피를 묻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괜히 복잡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들에게 있어서는 한 사람의 위태로운 생명보다는, 어떤 규정과 자신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 이후에 그 사람을 만난 것은 그 사회에서 천대받던 계층인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간 후, 정성껏 그 사람을 돌보아줍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돈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 보셨나요? 이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보게 되는 소재 중 하나가 냄새가 아닌가 싶습니다. 반지하 눅눅한 공간에서 스며들어 몸에 배어버린 냄새는 상류층 사람들과 그들을 구분하는 낙인과도 같습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 그래서 함께 어울릴 수 없고 거리감을 유지해야만 하는 관계가 그 냄새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것이지요. 사제와 레위인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발견하고 다른 길로 감으로써, 그 거리감을 좁히려 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존재, 그리고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라고 규정지어 버린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기 손을 더럽히고 싶어하지 않는 사제와 레위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강력하게 존재하는 유혹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것이 냄새이든, 피이든, 더러움이든 가까이하려 하지 않고, 만지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의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 거리감을 좁힌 것은 물론, 쓰러진 사람을 동등하게 대합니다. 자기 노새에 태우고, 같은 여관으로 가서, 그 사람을 돌보지요. 사실, 이 초주검이 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쩌면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게 심하게 맞은 것을 보면 누군가의 원한을 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범죄자인지도 모를 일이구요. 아니면 이방인, 그러니까 요즘 말로 이민자나 난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안 사람은 굳이 따지지 않고, 동등한 사람으로서 그를 대해줍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지닌 측은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제와 레위인은 머리로 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복잡한 일에 연루되지나 않을까, 부정을 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들 때문에 정작 측은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이들을 향한 측은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측은하게 보시고, 부정이 타는지, 안 타는지 따질 겨를도 없이, 외아들의 시신이 누워있는 그 관에 손을 대시지요. 죄인들이라 여겨지는 병자들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대고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초대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이웃임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굳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의 거리를 없애셨고, 우리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등하게 눈을 맞춰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가 무엇이라고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창조물과 피조물의 거리를 없애신 그 신비를 묵상하면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우리도 서로의 이웃이 되기로 다짐하며,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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