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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사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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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9-04-06 20:53 조회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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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43,16-21 / 필리3,8-14 / 요한8,1-11>


뉴스를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정당하게 처벌을 받는 것을 볼 때면, 이 사회의 정의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가 마치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인 양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를 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괘씸한 마음에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합니다. 이렇듯 잘못한 사람이 처벌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실 자연스럽습니다. 또 그래야만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될 테니, 죄에 대한 처벌은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하나의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이 편안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자가 법에 따라 합당하게 처벌을 받는 것이 옳게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법에 충실하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에 잘못을 줄이고 싶은 정의로운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죄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받기라도 했다면, 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해서라도 이 여자가 죗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현행범을 단죄하지 않고 그냥 보내주시지요. 그래서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틀리지 않으셨을텐데, 그렇다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우리는 죗값을 묻지 않고 모두 용서하기만 해야 하는가? 과거의 잘못을 진상 규명하고 처벌받기를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닐까 고민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에 앞서 무엇보다 처벌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을 일컬어 교도소라고 하지요. 또, 교회가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목을 교정 사목이라고 합니다. 이때 교도소, 교정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죗값을 치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잘못을 교정하여 올바로 인도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처벌의 정신임이 이 단어들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처벌은, 교정하고 회복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사람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처벌은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의 처벌을 교회는 언제나 지지합니다. 또한, 과거의 왜곡된 진실이 있다면 투명하게 밝히고, 당사자들이 그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랍니다. 마땅한 처벌을 통해 그 사람이 회개하고 바른길로 돌아서서, 다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연옥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과도 비슷합니다. 그 상태에서 받는 벌을 통해 우리는 정화되어 마침내 하느님과 모든 성인들과의 친교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처벌은 언제나 변화되고 회복되는 것, 그리고 받아들여지고 친교를 나누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처벌은 단지 앙갚음, 혹은 분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율법의 정신 자체가 그러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 분풀이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근본으로 한 율법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충실히 따른다는 명분으로 돌을 집어 든 사람들은, 수단이어야 하는 율법을 목적으로 잘못 믿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율법 자체가 거룩함을 보장한다고 절대화시켜 버리고, 절대화된 율법에 근거해서 이제 거리낌 없이 살인마저 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은 죽이는 법이 아니라 살리는 법이어야 한다고, 단죄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이어야 한다고 알려주시며, 율법의 본래 정신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했던가요? 돌을 던져 죽이는 처벌이 아닌, 용서하는 자비로 이 여자는 이제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 참으로 맞습니다. 오늘 제1독서가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절망 가운데서도 새길을 내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분이십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감히 남의 죄를 판단하고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이 이야기하듯, “(우리)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야고4,12) 물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예컨대 판사와 같이 심판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심판자는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심판할 때, 그 심판이 얼마나 불완전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근거로 삼은 레위기 22장 말씀에 따르면, 간음한 남자와 여자는 모두 처벌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이 여자는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하니, 분명 남자도 그 자리에 있었을텐데, 이들의 심판 범위는 오직 그 여자에게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힘이 세고 달리기가 빠른 남자는 도망가고, 잡기 수월한 여자만 잡아서 처벌하고 사건을 종료하려 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마치 오늘날 권력형 비리 사건 때 꼬리 자르기를 하듯, 누군가 희생양을 만들어 처벌하고, 모든 것이 해결된 양 위안 삼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만만한 사람에게만 돌을 던지는 심판은 완전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심판에 관해 돌아보고 묵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혹시라도 원칙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심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여 사랑 없는 율법주의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은지, 또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또 기억하게 해주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단죄하러 오지 않으시고 구원하러 오셨음을 말입니다. 특별히 사순시기를 지내는 이때, 우리도 그분의 마음을 닮아, 사람을 살리는 법, 또 사람을 받아들이는 법을 마음에 새기고, 더욱 자비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땅에다 무언가를 쓰셨듯이, 지금 우리 마음에 당신의 자비를 쓰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주님 자비에 더욱 의탁하고, 그 자비를 마음에 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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