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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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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들바람 작성일19-02-02 23:01 조회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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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3일 연중 제4주일

 

예레 1,4-5.17-19; 1코린 12,31-13,13; 루카 4,21-30

 

... 사랑 ...

 

오늘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유사합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고 전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놀라움과 기쁨은 잠시, 이내 예수님이 얼마 전까지 자신들과 함께 살았던 과부의 아들이란 걸 의식하고, 방금 전 자신들이 받았던 감동을 의심하며 설왕설래 합니다. 어제까지 자신들의 일을 해주며 먹고 살았던 예수가 어떻게 자신들을 이렇게 놀라게 할 수 있는지 의심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당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신들을 강하게 문책하시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감히 예수가 하느님의 이름을 사칭하여 예언자요, 자신들이 기다려온 그 메시아 행세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서의 말씀은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바로 예언을 성취할 메시아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의 말에 따르면 메시아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데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알고 있으니 그들의 눈에 예수는 자신들을 속이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죄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걸림돌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그리고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매번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도 어쩜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쩜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랑을 잘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에게 나의 사랑을 강요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을 잘 모릅니다. 만약 우리 각자가 사랑을 잘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울 것입니다. 아니 어쩜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혼란은 우리의 확신이 자만이요 교만임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온전한 사랑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감히 사랑을 실천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을 잘 보고, 기억하여 우리 역시 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조금씩 걸음마를 배우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그 사랑의 행보를 조금씩 조금씩 내딛으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혹여 넘어질세라 두려움이 찾아온다면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아장 아장 걷다보면 어느 사이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타 언덕에 다다르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한 사람들처럼 자신이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랑을 막무가내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면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다 다툼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매번 이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나는 기껏 최선을 다해서 사랑한다고 했는데 정작 상대와는 오히려 멀어지는 체험을 말입니다. 반대로, 상대의 사랑을 내가 알고 있는 사랑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서로 간에 상처만을 남길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지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매번 반복되는 도전과 실패의 연속 속에 좌절하여 다른 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모든 어려움의 한 가운데 바로 사랑에 대한 나의 독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에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의 찬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거역하고 모욕하는 예수의 추종세력을 뿌리 뽑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라고 처음부터 사랑의 찬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확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각고의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닮겠다는 열정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읊은 사랑의 찬가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뵙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한 시메온처럼, 각고의 노력 가운데 은총으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하여 나누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면, 사랑의 찬가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열린 사랑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물론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한 이러한 사랑은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정되는 바로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내 지치고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참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우리의 영혼은 쉴 수 없습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사랑하시는 것이라는 믿음 아래에서, 주님께서 온전히 나를 차지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 가운데 걷는 신앙의 여정에서 자라고 성장하는 열매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하는.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의 여정을 걷기 위해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에 의해 빚어져 성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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