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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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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8-12-29 14:43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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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3,2-6.12-14 / 콜로3,12-21 / 루카2,41-52>


예전에 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과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서로 싸운 적이 있을까? 그와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없어서 결국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다수가 아마도 싸운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예상되었던 것이 오늘 복음 내용이었지요. 이제 열두 살 된 아이를 잃어버렸으니 부모가 서로의 탓을 하며 말다툼 정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설사 이 사건으로 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 생각으로는 적지 않은 싸움이 예수님의 가정 안에서도 있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대신에 이분들은 아주 잘 싸우셨을 것 같습니다.


이때 잘 싸운다는 의미가 절대로 지지 않고 백전백승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필요할 때, 적절한 방법으로 싸우고, 이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뜻이지요. 사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을 통해서 전에 모르던 상대방의 생각을 알게 되고,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말 심각한 가정은 다툼이 많은 가정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다툼조차 없는 가정일 때가 많습니다. 서로가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고, 그래서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기를 포기해서 싸움이 없는 그런 가정의 경우 말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 싸움은 아직 서로에게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도 잘 싸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잘 싸우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보다 싸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다투셨다면, 그 다툼의 목적은 예수님을 찾는 것이지, 서로의 잘못을 가려내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처음 목적은 잊어버린 채 어느새 감정싸움을 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곤 합니다.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한 고민, 내 상황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 가족끼리 더 친교를 나누고 싶은 바람에서 시작한 논쟁이, 어느 순간 케케묵은 과거의 일까지 들추어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싸움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싸움을 잘 들여다보면 싸움의 목적을 잊어버려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잘 듣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를 묵상하면서 인상적으로 다가온 구절은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콜로3,16)라는 말씀입니다. 지혜가 무엇일까 생각할 때마다 저는 지혜로운 왕이었던 솔로몬을 떠올려 보곤 합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청하라고 하시자, “듣는 마음”(1열왕3,9)을 주시라고 청하지요. 잘 듣는 것만큼 더 지혜로워지는 길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싸울 때도 상대가 왜 싸우려고 하는지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듣기 싫다고 귀를 닫아버려서는 잘 싸울 수가 없을 테니 말이지요. 그런데 잘 듣는다는 것은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바로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까지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적극적 경청’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들음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 조건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사흘에 걸쳐 겨우 잃었던 예수님을 찾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루카2,49)라는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시지요. 이에 성모님께서는 아들을 꾸짖거나 그의 기를 꺾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생각해보면 내 조바심 때문에 상대를 들볶거나 답변을 재촉해서 필요 없이 싸움이 커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 싸움의 결과를 당장 보고 싶은 조바심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결과에 이르기까지 서로 소화할 시간이 필요할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그 시간동안 우리 안에서 직접 일하시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기도 하십니다.


끝으로 네 번째 조건은 잘 화해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싸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잘 화해하는 가정이라고 하지요. 백 번 싸워도 백 번 화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을 보더라도, 화해를 잘하려면 자존심을 좀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더 깊이 사랑하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족은 서로 적이 되어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 팀이 되어 같은 목표, 곧 하느님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협력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재차 말하는 ‘순종’의 의미도 잠시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고, 또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콜로3,18; 루카2,51) 이를 잘못 해석하면 마치 남편은 아내보다 높고, 부모는 자녀보다 높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피하기 위해서는 순종, 혹은 순명의 궁극적인 대상이 사람이 아닌 하느님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와 같은 수도자들은 가난, 정결과 더불어 순명을 서원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수도회 장상에게 순명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장상에 대한 순명 역시,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가정 안에서의 순종도, 누가 더 높다는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아가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보다, 특정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가정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작은 교회가 되는 것이겠지요.


끝으로 제가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 의미 있게 보았던 장면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구두닦이의 모습인데요, 한국에서 구두 닦는 분들을 보면 손님을 앉히고 본인은 머리를 숙여 닦는 모습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제가 보았던 미국의 구두닦이들은 손님에게 사다리를 올라 높은 의자에 앉도록 하고, 본인은 꼿꼿이 서서 구두를 닦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를 더 높임으로써 자신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꼿꼿이 서는 모습이 참 지혜로워 보였습니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아내를 왕비로 높여 대하는 남편은 결국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고, 또 남편을 왕으로 대하는 아내는 스스로 왕비가 되는 것이지요. 또 내 자녀들을 왕자요 공주로 존중하는 부모는 스스로 왕과 여왕이 되는 것일테고, 반대로 내 부모를 왕처럼 모시는 자녀들은 스스로를 왕자요 공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높일 때, 나도 함께 높아진다는 것이지요.


성가정축일을 맞아서 우리 가정이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루었던 성가정의 모범을 따를 수 있도록 다짐하고, 또 필요한 은총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서로 잘 싸우고, 또 서로를 존중하고 높여주는 가정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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