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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눔

[11/11] 연중 제3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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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8-11-10 20:35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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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왕17,10-16 / 히브9,24-28 / 마르12,38-44>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가격표를 보는 것입니다. 과연 가격은 대체로 그 물건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사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는 걸 보면, 가격을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오늘날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많은 것들의 가치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모든 것의 가치가 돈으로 규정되는 세상 속에서 오늘 복음은 조금 낯설게 들립니다. 왜냐면 많은 돈을 예물로 바치는 부자들보다, 고작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치는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봉헌했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당시에 빵 덩이 하나를 사기 위해서 70 렙톤 정도가 필요했었다고 하는데, 요즘 빵 덩이 하나에 3천원 정도 한다고 할 때, 렙톤 두 닢은 기껏해야 백 원이 채 되지 않는 액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헌금함에 넣은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누구보다 많이 봉헌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산법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이 봉헌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계산법은 얼마나 많이 내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비웠는가가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보다 비우기 쉬우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지상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비우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모든 것을 완전히 비워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듣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렙톤 두 닢은 그 의미 그대로 가난한 과부의 아주 적은 봉헌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부들은 이 렙톤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가톨릭성가 211번 ‘주여 나의 몸과 맘’ 아시지요? 이 성가는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드리오니,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받으소서.’라고 진행이 됩니다. 교부들은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바로 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과부의 봉헌은 그저 적은 양의 봉헌이 아니라, 몸과 마음 혹은 몸과 영혼, 그러니까 자신의 온 존재를 봉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예외 없이 렙톤 두 닢,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온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바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 하느님 품 안에 안기게 되는 그 순간 말이지요. 그래서 죽음을 맞이하는 분들의 모습은 아주 특별한 감동을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는 7년 전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어머니는 주무시는 모습으로 마지막에 ‘푸우’하고 숨을 내쉬고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렇게 마지막 숨마저 다 내놓고 완전히 비워내시는 모습이 참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렙톤을 봉헌했던 과부처럼, 어머니는 당신 몸과 영혼을 다 드리고, 마지막 숨마저 내어놓으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 눈에 그것은 완전한 비움, 가난의 완성으로 보였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세 가지 서원을 합니다. 가난, 정결, 순명이지요. 제 어머니는 수도자도 아니셨는데, 그 죽음의 순간에 세 가지 서원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마지막 숨마저 비워내고 하느님께 돌려드림으로써 가난을 완성하셨고,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정결을 완성하셨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함으로써 순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수도자로 서원하며 살던 저로서는 그 모습에 참 부끄러워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는 어머니 마지막 모습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묵상하면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며 가난을 완성하셨던 어머니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위령성월은 무엇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가신 분들을 통해 교훈을 얻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맞이할 죽음의 순간을 그분들을 통해서 미리 경험하고, 그에 따라 지금의 삶을 잘 살기로 다잡는 것이지요. 필요 이상으로 물질적인 것들이나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않기로, 또 무엇보다 하느님을 가장 첫 자리에 두기로, 또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순명하여 응답하기로 다짐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위령성월은 산 이들과 죽인 이들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봉헌하는 이 미사도 사실 지상에서만 거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상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이 미사를 봉헌하시지요. 그리고 한번 사제는 영원한 사제이니 저는 죽어서도 그곳에서 미사를 집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각각의 미사를 우리는 지상 전례, 그리고 천상 전례라고 하는데, 이 두 미사 때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와 성혈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코린토1서 10장 17절을 보면,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그리스도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천상 영혼들과 우리들 역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돌아가신 영혼들과 우리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일치를 이룰 수 있고,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모님과 모든 성인 성녀들, 그리고 연옥 영혼들까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 또 반대로 나 역시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또 그 기도로 그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종종 먼저 떠나간 영혼들, 특별히 제 어머니께 어떤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자고 청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여전히 결합 되어 있음을 확인하곤 합니다.


위령성월을 맞아 우리가 죽음을 좀 더 가까이서 바라보고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보여주신 교훈을 통해 우리 삶에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해보고, 또 무엇보다 영혼들과 깊은 친교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안에서 결합 되어 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순간에 우리도 기쁘게 렙톤 두 닢을 봉헌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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