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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눔

[11/4] 연중 제3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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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카엘 수사 작성일18-11-03 14:44 조회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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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6,2-6 / 히브7,23-28 / 마르12,28ㄱㄷ-34>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깝게 지내던 유대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가끔 이 친구들 집에 초대를 받아 가는 일도 있었는데, 그 친구들의 집을 드나들 때마다 인상적으로 보았던 것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바로 메주자(Mezuzah)라는 작은 장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메주자는 우리말로 문설주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인데, 마치 도장 케이스처럼 생긴 이 장식 안에는 오늘 제1독서 말씀,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신명기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메주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 집에 특별한 보호를 베풀어주신다고 믿는데, 어떤 이들은 메주자를 지날 때마다 그 장식을 손으로 만지고 다시 입에 갖다 대는 동작을 취하기도 합니다. 입을 맞추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오늘 신명기 말씀,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은 그 어떤 율법 조항보다도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도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거듭 가르치고, 이마나 손에 붙이거나, 심지어 문설주와 대문에까지 써 놓으라고 했던 것인데, 오늘날 유대인들도 그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또 딱지가 앉도록 “Shema!”,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을 매일같이 수없이 되뇌인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계속 되풀이해서 머릿속에 각인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이 말씀이 자신들의 삶에 완전히 녹아들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613개조에 달하는 율법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웃들에게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규정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율법의 가장 큰 계명, 또한 모든 율법을 아우르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이 메주자를 지나고 입을 맞출 때마다 이들은 다시금 이 두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두 계명은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 불리는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문에 직접 붙여 놓지는 않더라도, 늘 마음에 새기고 되뇌고 또 그렇게 살고자 다짐하는 그러한 계명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다른 두 계명이 아니라, 두 얼굴을 지닌 하나의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요한1서 4장 2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4,20)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마련이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기도만 하고 주위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나, 사람들은 돌보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들어서면 십자가와 제대를 향해서 인사를 드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감실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그 안에 참으로 예수님께서 계심을 믿고 알기 때문이지요. 또 어떤 때는 성체조배를 하면서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신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하는 노력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감실 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는 만큼,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감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 성당에 감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마주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며 성체조배를 할 수는 없을까? 그게 교리적으로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만일 우리가 서로를 감실로 받아들이고 대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 교회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리라 생각됩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통합되는 순간이 될테니 말입니다.


더 넓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음을 믿지요. 그러니 어떤 사람이 성체를 받아 모시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금방 이야기했던 걸어다니는 감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참으로 그 사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 세상 역시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전히 통합되는 순간이 될테니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마더 데레서 성녀가 하셨던 말씀 하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빵의 형상인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수녀님께서는 실제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께 봉사하며 평생을 사셨지요. 그분에게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도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이 말씀이 칭찬의 말씀일까요?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말은 분명 가깝다는 의미이긴 하지만, 아직 그 나라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쩌면 그 율법학자가 사랑의 이중계명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하나로 통합할 수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당신 사랑에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께, 우리 안에도 그 사랑이 더욱 자라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통합될 수 있는 은총을 함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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